파리에 온 이후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아내와 함께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다. 사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정통 서비스를 온전히 누리려면 저녁에 가야 하지만, 아이들 때문에 저녁엔 갈 수가 없다. 게다가 보통 점심 메뉴가 저녁보다 훨씬 저렴해서, 단품 메뉴를 100유로 정도에 즐길 수 있다. 여전히 매우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미식의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 1년에 한 번쯤은 사치를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합리화할 만한 수준이다.
결혼 11주년 기념일에는 Table Bruno Verjus를 예약했다. 해산물을 중심으로 한 모던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오픈 키친 구조라 셰프와 주방 팀이 요리하는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어 흥미로울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레스토랑에 도착해 메뉴를 보고 당황했다. 메뉴판에는 ‘오늘의 메뉴’ 딱 하나만 있었고, 그 가격이 무려 400유로였다. 200유로 정도라면 잠시 고민이라도 해봤겠지만, 400유로는 도저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서버를 불렀다.
“구글맵에서 본 메뉴랑 많이 다르네요. 인터넷에는 단품 메뉴가 있던데요.”
“최근에 메뉴를 전면 개편해서 지금은 점심과 저녁 모두 단일 테이스팅 메뉴만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시 보니 메뉴판에 미슐랭 스타가 두 개 붙어 있었다. 얼마 전에 2스타 레스토랑으로 승격된 모양이었다. 나는 서버에게 점심으로 400유로를 쓸 생각은 없었다고, 구글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아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내와 나갈 준비를 했다.
이야기를 들은 셰프가 직접 우리 자리로 왔다. 자기 식당에서 결혼기념일을 망칠 수는 없다며 우리가 예상했던 150유로에 맞춰 특별히 메뉴를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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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0가지의 작은 요리들이 하나씩 나왔다. 셰프의 철학은 고품질의 신선한 식재료를 본연의 맛을 살려 요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굴, 바닷가재, 조개, 새우 등 익숙한 재료였지만 전혀 새로운 맛이었다. 각 재료와 소스가 복잡하고 다양하면서도 잘 조화가 되었다.
주방에서 요리사들이 협력하며 요리를 완성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요리사들이 대화를 나누며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셰프는 필요한 순간마다 나타나 코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요리가 완성되면 서버가 요리를 가져와 재료와 조리법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파인 다이닝이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코로나 팬더믹 기간, 레스토랑 문을 닫고 그리스의 농장에서 쉬던 셰프가 창 밖으로 흘러들어오는 올리브 나무 냄새를 맡고는 그 향기를 고객들과 나누고 싶어 준비한 마들렌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서버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창 밖에 올리브 나무가 있다고 상상하며 마들렌을 올리브 오일에 찍어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레스토랑을 나서며 셰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덕분에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픈 키친이라 다른 손님들의 메뉴와 우리의 것을 비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의 모든 메뉴를 맛보았다. 셰프가 그의 요리를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많이 배려해준 것이다.
“셰프는 고객을 굶겨서는 안 됩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셰프가 환한 미소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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