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의 에어비엔비에는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빵, 시리얼, 요거트, 우유, 커피가 있는 단출한 구성이지만 빵이 맛있으니 훌륭한 식사가 된다. 매일 아침을 먹으면서 필립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립 부부가 영어를 전혀 못해서 우리의 어설픈 프랑스어로 겨우겨우 대화를 했다. 크리스틴은 항상 어제 저녁에 어느 식당에 갔는지 묻고 필립은 오늘은 어디 갈 건지 질문을 했다.
"오늘은 몽바지악에 갈거에요."
"와! 거기 스위트 와인이 정말 좋지요! 바로 옆 베르주락에도 갈거죠? 아름다운 마을이에요."
"가 볼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몽바지악 Monbazillac 에 가기 전에 Issigeac에 먼저 들렸다. 중세 시대의 성벽에 둘러 쌓인 작은 마을로 일요일 아침에 열리는 시장이 볼만하다고 해서 찾아갔다. 구시가지의 수백 년 된 집들 사이로 난 작은 골목길이 모두 시장으로 바뀌었다. Issigeac 시장은 사흘라에 비하면 작지만 그만큼 더 동네 시장 느낌이었다.
옷이나 기념품보다는 식료품을 파는 가게가 훨씬 더 많았다. 푸아그라, 소시지 등 오리 가공품, 호두, 와인 같은 지역 특산품들이 주를 이룬다. 수공예품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다시 Issigeac에 들렀는데 오전에 왁자지껄하던 마을은 온데간데 없고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이 되었다. 사람들이 거리에 내놓은 테이블에 끼어 앉아 와인을 마시면서 웃고 떠들던 곳이 인적 없는 길이 되었다. 같은 길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필립이 추천 한 베르주락은 Issigeac에서 차로 20분 정도 걸렸다. 시내에 일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쌀밥을 먹을 기회가 있으면 챙겨 먹어야 한다. 8세 이상 3인은 초밥을 먹고 6세 1인은 함께 나온 미소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었다. 아이들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것을 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중국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시아 사람이세요?"
중국어로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대답하고 나니 이상한 질문이다. 중국어로 '아시아 사람'이냐고 묻다니. 나는 중국에 5년을 살아서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아주머니는 중국어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반갑고 나도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좋았다.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주머니 프랑스어는 할 줄 아세요?"
"아니야. 거의 못해요. 애들이 여기에 식당을 차렸는데 힘들어해서 와서 도와주고 있어요."
프랑스어를 못하시는 데도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주문을 받고 응대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대단한 분이다. 식당을 나오면서 "사장님 힘내세요!" 이야기해주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으니 마음 놓고 여유 있게 도시를 돌아봤다. 베르주락은 시라노 Cyrano의 도시였다. 마을 중앙에 그의 동상이 있고, 거리 어디에서나 그의 이름을 딴 간판과 기념품들을 볼 수 있었다. 시라노는 1897년에 초연된 프랑스 희곡의 주인공으로 중세 시대에 베르주락에 살았던 실존인물이다. 뮤지컬,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되어 프랑스에서는 돈키호테급으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한다. 집에 가면 희곡을 사서 읽어 봐야겠다.
베르주락의 남쪽은 와인 생산지역이다. 서쪽의 보르도 와인과 차별화하기 위해 스위트 와인에 집중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에 필립도 '스위트 와인이 좋은 곳'이라고 이야기를 했나 보다.
회사 동료가 추천해준 몽바지악에 갔다. 와이너리 Château du Haut-Pezaud에 가서 시음을 했다. Bergerac 와인 한 종류와 Monbazillac AOC 와인 두 종류를 마셔봤다. 너무 달아서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아내는 맛있다고 했다.
80% Sémillon, 10% Muscadelle, 10 % Sauvignon gris를 혼합해 만든 와인을 두 병 샀다. 와이너리 직원이 푸아그라와 잘 어울리는 와인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지역의 음식과 그 지역의 와인이 잘 맞는다는 떼루아 Terroir 이야기는 프랑스 어느 와이너리를 가나 듣게 된다.
와이너리 앞 포도밭 산책을 했다. 산책로를 따라가면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포도 품종을 다 볼 수 있었다. 포도 품종 별로 특징을 안내하는 설명 표지판이 있어서 많이 배웠다. 품종별로 모양이 다르고 한 알 따먹어보니 맛도 달랐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차 뒷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어떤 와인이 더 달았는지 토론하고 있었다. 시음을 할 때 혀를 한 번씩 대보게 해줬더니 나름 맛을 느꼈었 나보다. 윤수는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과의 차이에 대해서 나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작년 겨울에 알프스에 가는 길에 부르고뉴에 들러 앙상한 포도나무를 봤고 봄에는 루아르에서 새싹을, 여름에는 알자스에서 포도가 익어가는 것을 봤다. 가을에는 샹파뉴에 가서 황금빛으로 물든 포도나무를 보여줘야겠다. 포도의 한 철을 다 보는 건 아무래도 특별한 경험이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애인과 좋은 레스토랑에 갔을 때 와인 리스트를 보며 "내가 어릴 때 프랑스에서......" 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아빠로서 더없이 뿌듯하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수도원 앞에 차들이 잔뜩 주차되어 있어서 들려봤다. 사실 교회를 보러 온 사람들의 차가 아니라 교회 앞 벼룩시장에 온 사람들의 차들이었다. 파리의 유명한 방브 벼룩시장보다도 훨씬 큰 규모였다. 이런 시골에 이렇게 큰 벼룩시장이 열리다니. 도르도뉴 사람들의 시장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
마을 중앙의 수도원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Abbaye de Saint-Avit-Sénieur 수도원은 12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내벽의 프레스코 벽화가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
마을을 지나가는 길에는 스페인까지의 거리가 적힌 산티아고 순례길 안내판이 서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프랑스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프랑스어로는 Saint Jacques de compostelle라고 부른다. 거리를 보니 여기에서는 파리보다 스페인이 더 가까웠다.
저넉은 필립이 추천한 동네 식당에 가서 먹었다. 식당은 유쾌하고 털털한 필립이 딱 좋아할만한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필립의 아내 크리스틴은 어제 저녁에 우리가 갔던 예쁜 레스토랑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둘이 완전히 다른데...... 부부의 취향이 이렇게 다른 것도 참 신기하다.
야채를 먹고 싶었는데 샐러드 메뉴에도 전부 오리 고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차피 고기를 먹어야 한다면 제대로 먹으려고 오리 가슴살 요리 magret de canard 를 주문했다. 프랑스에서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메뉴다. 제대로,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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