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들어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낮이 많이 짧아졌다. 프랑스 사람들은 벌써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한다. 춥고, 습하고, 어두운 파리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가을이 지나가버리기 전에 어디든 떠나야 할 것 같아 북부 프랑스의 중심, 릴 Lille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아침 일찍 잠든 아이들을 차에 태워 출발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자연사박물관 Musée d'Histoire naturelle de Lille. 릴까지 가서 동물 박제와 공룡 뼈를 보는 이유는 순전히 아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다. 자연사박물관 옆의 공원 Parc Jean-Bapatiste Lebas 에는 대형 놀이터도 있었다. 두 곳에서 오전 내내 즐거운 시간을 보낸 어린이들은 오후 시내 관광 일정에 잘 협조해 주었다.
레퓌블리크 광장 Place de la République 으로 이동했다. 레퓌블리크 광장에는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만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보자르 미술관 Palais des Beaux Arts 이 있다. 우리는 오후에 La Piscine 미술관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보자르 미술관은 입구만 보고 지나쳤다. 어린이들에게 1일 2 미술관은 무리다.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조금 걸으면 릴의 중심부, 그랑플라스 Grand Place가 나온다. 증권 거래소 La Vieille Bourse , 극장, 오페라, 상공회의소 Chambre de Commerce de Lille 등 화려한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는 광장이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럭비 월드컵을 기념해 럭비 빌리지가 꾸며져 있었다.
프랑스가 예선전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완벽한 경기력으로 8강에 올라 럭비 빌리지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간단한 럭비 게임을 해볼 수 있었는데, 럭비공을 차서 타깃을 맞추거나 패스해서 구멍에 넣으면 된다. 어린이들은 성공하면 볼펜이나 연습장 같은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실패해도 물론 다 선물을 주었다.
이 날 점심은 릴의 유명 파티세리, 메르트 Pâtisserie Méert 에서 와플과 차로 간단하게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파티세리 메르트는 주말에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빈 테이블이 없어서 와플만 종류 별로 사서 나왔다. 와플 하나에 3.2유로면 너무 비싼 것 아닌가 싶었지만, 그만큼 맛있었다.
어린이들이 레스토랑에 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어했지만 일요일이라 문 연 식당이 많지 않았다. 근처에 로컬 레스토랑 Les Compagnons de la Grappe에 갔다. 럭비를 보러 온 관광객들과 함께 30분을 기다린 끝에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레스토랑의 안뜰에 앉으니 기다리는 동안 쌓인 짜증이 사라졌다.
릴 대표 요리 웰시 Le Welsh 가 포함된 북부 치즈 특선 세트를 주문했다. 웰시는 빵 위에 체다 치즈를 올린 요리로 찾아 먹을 만큼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보다 같이 나온 다른 치즈 두 개가 훌륭했다. 슈티 CH'TI (북부 지방 사람을 부르는 말) 맥주와 잘 어울렸다.
점심을 먹고 구시가지를 걸었다. 다른 프랑스의 오래 된 도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다른 느낌은 이웃 나라 벨기에, 네덜란드와 공유하는 플랑드르 Flandre 문화의 영향이다. 중세시대 이 지역을 장악했던 플랑드르 백국 County of Flanders의 영향이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주에 벨기에를 여행하면서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 특히 영국인들이 많았다. 릴에서도 럭비 경기가 열렸기 때문에 이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구 증권거래소 안의 광장에는 중고책을 사고 파는 시장이 열려 있었다. 프랑스의 여느 벼룩시장이 그런 것처럼 살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화려한 건물에서 증권을 거래하던 과거의 모습은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집에 오는 길에 릴 근교 도시 루베 Roubaix에 있는 미술관 La Piscine 에 들렸다. 미술관 이름이 수영장 (La Piscine)인 이유는 이곳이 원래 수영장이었기 때문이다. 1932년 완공된 루베 시립 수영장은 50년간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노후화로 인해 1985년 문을 닫았다.
방치되어 있던 수영장은 건축가 Jean-Paul Philippon 에 의해 2001년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당시 최신 아르데코 양식으로 장식한 수영장의 메인 풀이 이곳의 하이라이트다. 가운데 이곳이 수영장이었음을 보여주는 풀이 있고, 좌우로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천장의 반원형 대형 창에서 빛이 많이 들어와 홀 전체를 은은하게 밝혔다.
미술관 곳곳에는 옛 수영장의 흔적들 - 샤워기, 탈의실, 보일러, 다이빙대 등 - 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마침 샤갈 특별전을 하고 있어서 샤걀의 그림도 실컷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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