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프랑스에 온 첫 해에 몽생미셸을 방문했다. 그때는 춥고 비가 오는 날씨에, 힘들다고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다니느라 정말 힘들었다. 아내와 '고난의 행군'이라고, 이거 순례자가 따로 없다고 농담을 했던 기억만 남았다.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몽생미셸을 이런 식으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아서, 다시 한번 가보았다.
이번에는 방에서 몽생미셸을 볼 수 있는 호텔을 예약했다. 호텔에 저녁 늦게 도착해 커튼을 열었더니 창 밖으로 몽생미셸이 보였다. 호텔 방에서 몽생미셸을 보며 컵라면으로 저녁을 먹었다. 멀리서만 보기에는 아쉬워 셔틀 버스를 타고 몽생미셸 앞까지 다녀왔다. 적막한 밤바다 속에서 홀로 빛나는 수도원이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다음 날, 호텔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일출을 보려고 했지만 비가 내렸다. 몽생미셸은 안개에 가렸다가 다시 모습을 드려내기를 반복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몽샐미셸을 그림으로 남기는 동안, 나는 몽생미셸의 역사에 대해서 찾아봤다.
아이들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해 챗GPT에게 몽생미셸을 배경으로 바다를 건너 침략해 온 개구리 종족과 맞서 싸우는 두꺼비 수도사들의 이이갸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자, 숨이 넘어갈 만큼 깔깔 웃어댔며 즐거워했다.
아침을 먹으러 호텔 레스토랑에 갔다. 통유리 창을 통해 몽생미셸을 볼 수 있엇기 때문에 레스토랑의 의자들이 모두 창을 향해 놓여 있었다. 호텔에서 정말 원 없이 몽생미셸을 봤다. 다른 호텔에 비해 가격이 비쌌지만,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느지막이 체크아웃을 하고 섬으로 이동했다.
먼저 수도원을 찾아갔다. 아이들은 4년 전에는 힘들어했던 계단을 이번에는 단숨에 올랐다. 수도원 입장권을 예매할 때 수도원 투어를 무료로 예약할 수 있었다. 오전에 하는 영어 투어를 예약했는데, 손님은 우리 밖에 없었다. 덕분에 오붓하게 프라이빗 투어를 할 수 있었다.
45분짜리 짧은 투어였지만 가이드가 정말 훌륭했다. 쉬운 영어로, 유머를 섞어 가며 수도원의 구조와 역사, 그리고 수도사들삶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수도원의 구조는 중세 사회와 기독교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가이드 투어를 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들을 많이 배웠다. 투어 시간이 길지 않아 아이들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었다.
투어가 끝나고 다시 우리끼리 수도원을 한 바퀴 돌았다. 비수기라 그런지 수도원이 텅 비어 있었다. 고요한 수도원에서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수도원을 나와 마을을 둘러보며 내려왔다. 과거 이 마을은 순례자들을 위한 여관과 식당, 성물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업종은 같지만 대상이 바뀌어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 연간 350만 명이 찾는 섬에 가게 수는 많지 않으니 서비스가 별로 좋기 않기로 유명하다. 우리는 마을을 지나치면서 구경만 하고 나왔다.
몽생미셸의 가장 인기 있는 사진 촬영 장소는 주차장 근처 초원이다. 몽생미셸을 배경으로 초록 들판에서 풀을 뜯는 양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서인지 방목된 양들을 볼 수 없었다.
이곳의 양들은 소금기가 있는 풀을 먹기 때문에 양고기가 짭짤한 맛으로 유명하다. 점심으로 양고기를 먹으려고 했지만 아침을 든든히 먹은 터라 특별히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 노르망디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갈레트를 먹었다.
오후에는 D-DAY 해변에 들렀다. D-DAY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벌인 1944년 6월 6일을 뜻한다. 이 작전에서 영국군과 미국군, 캐나다군이 노르망디의 5개 해변에 상륙했다. 우리는 그중에서 영국군이 상륙한 골드 비치를 방문했다.
먼저 골드비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360도 영화관 Arromanches 360 Circular Cinema 를 찾아갔다. 이 영화관에서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이후 100일간 이어진 전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전투 기록 영상이 360도로 펼쳐져서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관 앞의 추모 공원에 서면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인공 구조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2차대전때 연합군이 건설했던 인공 항구인 멀베리 항구 Mulberry Harbour의 잔해다. 당시 노르망디의 주요 항구인 칼레와 셰부르에는 독일군이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해 놓았다. 그래서 연합군은 골드 비치에 상륙한 뒤 인공 항구를 건설해 물자와 병력을 공급했다.
파란 바다에 떠 있는 녹슨 구조물들은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다. 또한 전쟁을 겪은 주민들에게는 전쟁의 아픔을 계속해서 상기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잔해를 보존하기로 결정하고, 매일 감내해내는 지역 주민들의 의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변으로 내려가봤다. 골드 비치의 모래는 정말 고왔다. 아이들은 모래가 정말 예뻐서 이곳에 '골드 비치'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골드'는 영국군이 상륙 작전을 위해 부여한 암호 코드 명으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사실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기억하도록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아이들은 모래에 그림을 그리면서 놀았고, 나는 해변에 남겨진 인공 항구의 잔해를 둘러보았다. 썰물 때라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철골 구조물들은 자연의 힘에 의해 서서히 부식되고 있었지만,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수만 년은 걸릴 것 같았다. 압도적인 모습에 마음 한편에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2차 대전의 상처가 아직 유럽 전역에 남아 있는데도,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에 의한 희생자는 점점 줄어들 고 있고, 그러므로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희생자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모래사장에서 실컷 놀고 온 아이에게 멀버리 항구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 주었다.
"아빠, 난 이런 걸 보면 정말 멋있기도 하고, 정말 무섭기도 해"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었다. 역사의 현장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이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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