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알자스 지방은 프랑스의 주요 화이트 와인 산지이다. 드넓은 포도밭 사이에 작고 예쁜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고 '알자스 와인 루트'가 이 마을들을 연결한다. 여름 휴가 기간 와인 루트를 따라가며 마을들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알자스 출신인 회사 동료에게 아이들과 알자스로 여행을 간다고 이야기했다. 고맙게도 가봐야 할 곳과 먹어야 할 것을 장문의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알자스 와인 루트에는 예쁜 마을이 많아. 오베르네, 에귀샤임, 리퀴비르, 카이제베르그, 리보빌레…… 그림 같은 마을에서 와인까지 생산해. 몇일 걸리더라도 꼭 다 가봐. 와인도 종류별로 마셔봐야 해!"
지도를 찾아보니 아이들을 데리고 와인루트를 다 돌아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북쪽의 마을들은 포기하고 남쪽의 마을들만 가기로 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Rorschwihr라는 작은 마을의 집을 에어비엔비로 빌렸다.
Roschwihr는 와인 루트의 여느 마을과 같이 포도밭 가운데 자리잡았다. 숙소가 언덕 위에 있어 전망이 좋았다. 창문을 열고 마을의 포도밭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매일 아침마다 멀리 독일의 블랙 포레스트 위로 떠오르는 해도 볼 수 있었다.
첫날은 숙소에서 쉬고 다음 날 와인 루트를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 언덕에 자리잡은 포도 밭에 보주 산맥에서 내려온 안개가 덮여 있었다. 한여름의 포도 나무는 눈부신 초록색이다. 포도밭 사이사이로 마을들이 보인다. 마을 중심에는 항상 교회가 있고 교회 주변에 목조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숙소에서 가까운 리보빌레 Ribeauvillé에 먼저 가봤다. 마을 중심 도로를 따라 목조 가옥이 늘어서 있다. 집집마다 창문에 꽃 화분을 걸어 놓았다. 만발한 꽃들은 풍성하고 화려하면서도 집 색깔과 잘 어울렸다. 꽃을 잘 못 키우면 이 마을에서 쫓겨나는 걸지도 모른다.
마을의 서쪽 산 위에는 오래된 성들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12세기에 지어진 성으로 지금은 폐허만 남아있다고 한다. 지수가 성에 가보고 싶어했지만 한시간 넘게 가파른 산을 올라야 갈 수 있다고 해서 포기했다. 밥 많이 먹고 체력도 더 길러서 나중에 다시 오기로 약속했다.
예쁜 마을들을 찾아 다니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여행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을 하루에 한 곳 방문하기로 했다. 첫 날은 위나비르 Hunawihr에 있는 작은 동물원에 갔다.
동물원에는 알자스의 상징인 황새가 정말 많았다. 황새 둥지 안에서 꼬물거리는 아기 황새들도 볼 수 있었다. 마침 수달 먹이를 주는 시간이라 수달이 물고기를 사냥하는 모습도 봤다. 동물 우리 마다 퀴즈 형식의 만화 안내판이 있어서 아이들이 재미있어 했다.
위나비르에는 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교회가 있다. 15세기에 지어진 교회로 1687년부터 가톨릭과 개신교가 같이 사용해왔다고 한다. 교회 주변에 성벽이 둘러 쌓여 있는 것이 특이했다. 알자스를 여행하면 성벽을 많이 보게 되었는데, 독일과 프랑스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 흔적이라고 한다.
다시 와인 루트를 타고 리퀴비르 Riquewihr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알자스에 왔으니 알자스 음식을 먹기로 했다. 마을에 들어가보니 눈에 보이는 건 전부 알자스 식당이었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있지도 않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알자스 대표 요리 슈크르트 choucroute 와 베코프baeckeoffe를 먹었다. 슈크르트는 발효시킨 양배추 위에 소세지와 삶은 돼지고기를 올린 음식이다. 소세지가 정말 맛있었고 양배추와 잘 어울렸다. 베코프는 돼지고기와 야채를 오랫동안 익힌 스튜다. 고기국물이 한국의 맛이라 아이들도 잘 먹었다.
점심을 먹고 마을 구경을 했다. 리퀴비르는 리보빌레와 분위기가 비슷했지만 더 크고 사람도 훨씬 많았다. 마을이 주변의 포도밭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서 어디에서나 포도밭이 보였다. 파스텔 톤으로 칠한 집, 예쁜 간판, 꽃...... 와인 루트에서 가장 매력적인 마을로 불릴 만했다.
아이들이 마을 주변을 돌며 해설을 해주는 꼬마 열차를 타자고 했다. 별로 타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원하니 타봤다. 열차에 비치된 헤드폰으로 한국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에 아이들은 신이 났다.
"아빠! 저 탑에서 범죄자들을 떨어뜨려 죽였 대!!"
마을의 역사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꼬마기차는 포도밭을 오르며 와인에 대한 설명을 했다. 리크위르의 Schoenenbourg 포도밭은 가장 우수한 와인을 생산하는 '그랑크뤼' 포도밭이라고 한다. 포도밭 정상에서는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열차를 타지 않았다면 이렇게 멋진 포인트는 찾지 못했을 것이다.
저녁에는 동네 와이너리에 와인 시음을 하러 갔다. 통유리로 마을 풍광을 볼 수 있는 멋진 건물이었다. 아이들 장난감이 많이 있어서 아이들이 노는 동안 편안하게 시음을 할 수 있었다.
와이너리 직원이 와인 리스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맨 위부터 차례대로 와인을 내왔다. 리스트 대로라면 리슬링, 피노그리, 피노블랑 3개 포도 품종 별로 각각 4병씩, 그러니까 12잔을 마셔봐야 했다.
처음 몇 잔은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뒤로 갈수록 취기가 올라 다 똑같은 맛으로 느껴졌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아내는 이미 과음한 상태. 리스트에 있는 와인을 다 마셨다 가는 큰일날 것 같아 중도 포기했다.
아내와 각자 제일 마음에 들었던 와인을 한 병 씩 골라 주문서를 작성했다. 다른 손님들은 와인을 박스 단위로 사가는데 달랑 두 병 주문하려 조금 민망했다. 주문서를 받아 든 직원이 물었다.
"게뷔르츠라미너가 우리 집 대표 품종이에요. 정말 향이 좋은데 진짜 안 마셔보고 갈 거에요?"
여러모로 실망시켜드려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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